10월 26일, 하얼빈 의거 - 이토 히로부미와 부정적 효과를 중심으로

  오늘 두번째 글이다. 원래 하루에 하나만 올리는 걸 원칙으로 하지만, 안중근을 언급하지 않고 10월 26일을 넘어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안중근 의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의 하얼빈 역에서 당시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했다. 그리고 뤼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이듬해 사형당하고 만다. 안중근은 특별한 사람이다. 남북 양쪽 모두에게서 위인으로 인정받는 근현대사 유일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4번째 손가락이 유달리 짧은 그의 손도장은 굳이 기념일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고, 윤봉길 의사와 함께 항일 의거의 대표로 꼽히기도 한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얘기를 하니까, 난 총살당한 이토 히로부미와 하얼빈 의거의 부정정 효과를 중심으로 글을 써보려 한다. 언제나 균형잡힌 시각은 중요하니까. 그리고 모두가 똑같으면 재미 없으니까.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영웅이다. 메이지 유신 당시 20대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구미 사찰단에 소속되어 선진문물을 받아들였고, 국비 유학생으로 독일에 가서 헌법 체제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래서 막부와 쇼군이 지배가 청산된 일본에 천황을 중심으로 한 내각제를 도입해 일본 현대 정치의 기원을 연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독일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제도를 만들었다. 천황의 실질적인 지배를 기초로 한 양원제 내각을 도입하고, 자신이 초대 총리에 오른다. 지금의 일본 총리는 중의원 선거의 제1당 당수 혹은 과반수를 넘은 연합의 지도자가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당시엔 메이지 유신의 원로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천황이 임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평생을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 몸바친 사람이었다. 조선을 일본 국익의 기준으로 여기고 청일, 러일전쟁을 치루며 일본을 아시아 제일의, 그리고 서구 열강의 대열에 낀 유일한 아시아 국가로 만들어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으로 결정한 것은 이토의 사망 후에도 계속 남아 있었다. 이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 바로 한일 합방인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토 히로부미는 쳐죽여 마땅한 사람이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영웅인 것이다.

  1909년, 한일 합방이 이루어졌을 때 일본은 한창 상승기에 있었다. 1894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고, 1914년에는 제 1차 세계대전에서도 승전국에 반열에 오르며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군축 협약에서 일본이 인정받은 전력은 프랑스와 비교했을 때 5:3의 비율이었다. 세계에서 2위의 전력을 모두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협약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의 급부상은 메이지 유신과 그 이후 정책 방향의 결정에서의 이토 히로부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이러한 이토를 총살할 수 있던 것은 치밀한 계획에 어느 정도 운도 따라줘서 가능했다. 위와 같은 업적을 이루어낸 이토는 거의 국가 원수에 준하는 경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의거는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크게 환영받은 일이었다. 중국인 중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단신으로 해낸 그에 대한 기사는 당시 중국 신문에서 아주 크게 다루어졌고 아직도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중국인들도 있을 정도이다. 요즘엔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면 조선족이 들고 일어나 소수민족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기 땜문에 중국에서의 기념은 점차 시들해져가는 추세이긴 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10년만 더 살았어도 세계와 우리의 역사는 크게 변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당시 세계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의 한국 통치 방식은 강경한 방향에서 소위 '문화통치'로 돌아서게 된다. 이는 오히려 강경 노선보다 더 안좋은 방향이었다. 강경 통치일 때는 한국의 반발이 더 심해져서 오히려 독립운동이 더 활발히 일어났을 것이지만, 유화 노선으로 가게 되면서 친일파들이 속속 등장하고 이 친일파들은 이승만 정부를 거쳐서 현재까지도 우리 사회의 주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방향으로 보자면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속 시원한 일이긴 하지만, 실제로 일본의 정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직적인 운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단발적인 사건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런 단발적인 의거의 반복은 실질적으로 우리의 독립운동과 민족 정체성, 단합에는 오히려 안좋은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약간은 든다. 그럴 힘과 자금을 모아서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 10월 26일은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은 하얼빈 의거 100주년임과 동시에,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년이기도 하다.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내용도 함께 쓰려 했지만, 너무 길어지면 스크롤의 압박도 생기고 시간관계상 박정희는 다음 기회에 쓰기로 한다.
* 이 글은 전적으로 글쓴이의 기억에 의존해서 쓰여졌습니다. 잘못된 사실이 지적되면 확인 즉시 수정하겠습니다.

by 야화 | 2009/10/26 17:44 | 시사 | 트랙백 | 덧글(2)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